1. 세계가 인정하는 한국의 기업, 그리고, 글로벌 리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90년대부터 질(質) 중시의 신경영을 내세우고, 우리나라의 CEO로서는 가장 앞서서 성공적인 글로벌 브랜드 구축을 해 낸 이건희 회장의 통찰력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Fortune이니 BusinessWeek니 하는 세계적인 경제주간지에서 브랜드 가치다 무슨 500대 기업이다 발표하면, 리스트를 따라 눈동자를 굴려 내려가다가, 삼성의 이름에서 딱 멈추고는 흐뭇해하는 경험을 가진 것은 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기업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일을 하다보니, 그간 그가 삼성에, 그리고 우리 사회에 가끔씩 아젠다를 던지는 그 만의 메시지 전달에 관심을 갖고 보아왔습니다. 질(質) 중시 신경영을 선포하면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 보자'라고 메시지를 던진다든지, 도쿄에 까마귀들이 광섬유 케이블을 부리로 쪼아 피해가 발생하는 상황과 관련, 출장 중 "도쿄 까마귀가 몇 마리있나?"라고 일본 주재원에게 선문답과 같은 이야기를 하여 일본 주재원을 당황시켰다는 이야기는 언론들도 그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재원의 현지상황파악능력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상상력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등등의 해석을 내놓곤 했습니다. 또한, 95년 당시 이기태 사장이 이끌던 삼성전자에서 15만대의 애니콜을 불태워, 불량률 제로 도전에 대한 전환점을 만들었다든지, "5-10년뒤 먹고 살 것을 찾아야"한다고 이야기해서, 잘 나가는 성장 속에서도 긍정적 위기감을 고조시킨다든지... 그의 수사학은 제가 강의할 때, 가끔씩 예로 들기도 합니다.

그는 어눌한 말투를 가졌지만, 위와 같은 예에서 보듯, 리더의 스토리텔링에 대해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수사학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2. 그런, 그가 최근의 삼성사태를 두고 어떤 수사학을 펼칠지는 제 직업적 관심사였습니다. 물론, 그의 수사학은 그가 이 사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의사결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그가 지난 주 검찰에 출두한다고 했을 때, 그가 포토라인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아래는 한겨레 기사 중, 이건희 회장이 한 이야기만 옮겨 놓은 것입니다.

(청사를 들어서면서)
“그런 기억 없어요. 그런 기억 없다고.”
“잘 모르겠네요.”
“한 적 없어요.”
“범죄집단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그것을 옮긴 여러분(언론사를 지칭)들이 문제가 있지 않으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청사를 나서면서)
"그 전에 국민 여러분들에게 할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것부터 합시다. 국민 여러분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삼성 문제로 이런 소란을 피워서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특검 수사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제 불찰이고, 모든 것이 제 책임이고, 제가 책임져야 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건수에 따라서 다 100% 인정은 안되고."
"내가 지시한 건 없어요."


3. 여기에서 그가 엉뚱하게도 언론사를 탓하는 모습을 지적하는 것은 이미 많이 다루어졌으니 그만 하겠습니다. 그보다 이 포스팅에서는 위기상황에서 리더의 스토리텔링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리더가 자신이 처한 위기상황을 하나의 스토리로 바라보는 관점은 때때로 자신이 어떤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를 줄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위기 상황이란 우리가 읽는 소설이나 동화에서 갈등 구조에 해당합니다. 삼성은 최근 그들의 역사상 가장 커다란 '갈등 구조'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이 갈등 구조에서 위기를 극복하는가, 못하는가에 열쇠를 쥐고 있는 주인공(hero)은 일정 시점까지는 누가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주인공보다 더 큰 역할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바로 작가(author)의 역할이지요. 작가는 자기 자신을 (위기 극복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도 있는 파워풀한 역할입니다. 중요한 점은, 기업의 위기 상황에서 CEO가 작가의 역할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시점상 한정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한 번 아니면 두 번이지요. 그것도, 이야기가 늘어지고 난 다음에는 그 기회는 보통 사라집니다.

4. '작가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첫번째 중요한 기회인 지난 주를 그는 위와 같은 스토리로 만들었습니다(물론, 그는 첫번째 '작가의 기회'를 보다 더 일찍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작가의 역할을 포기하고, 스토리의 흐름을 언론, 여론에 맡긴 듯 합니다. 당연히 보다 깔끔하게 갈 수 있는 스토리가 좀 지저분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작가로서 적극적으로 스토리의 흐름을 주도하려 했다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주말에 제 친구와 이 점을 놓고 잠시 대화를 하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이 스토리에서 주인공이자 작가로서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잡고 나가야 한다고. 그리고, 그가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15년전, 제가 삼성의 신경영을 선포하면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다 바꾸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의 사랑과 도움으로 삼성이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국민의 대표기업인 삼성이 앞으로도 더욱 큰 기업이 되도록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최근 여러가지 삼성 관련 사태로 인해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드려 정말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처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이젠 마누라와 자식, 그리고 제 자신이 바뀔 때라고...

결국, 지난 주 그가 보여준 드라마는 싱거웠고,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물론, 나와 같은 일반인이 상상도 못할 상황이 그에게 있었을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그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글로벌 리더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반전시켰을까요? 적어도 지난 주와 같은 스토리는 피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난 세월 동안 보여 준 그만의 철학과 성취, 그에 따른 의미있는 수사학을 믿기에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그가 아직 스토리 속에서 주인공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도 한 번은 더 남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다시 한 번 펼쳐질지도 모를 그의 수사학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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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6 03:27 2008/04/06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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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건희 회장의 인터뷰를 바라보면서

    Tracked from Communications as Ikor  삭제

    미디어 트레이닝을 하다보면 '과연 한두개의 표현에 대한 디테일 한 관심이 얼마나 위기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곤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사소해 보이는 표현과 포지션으로 단순한 위기를 국민적인 논란의 중심으로 올려 놓는 무지의 소치를 목격하기도 합니다.삼성 회장의 특검출두 인터뷰를 바라보면서, 삼성과 같은 '초대형' 기업 리더에게도 과연 기존의 미디어 트레이닝이 필요한가? 같은 의구심이 또 듭니다. 물론 오늘 이야기..

    2008/04/07 11:04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정용민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 며칠 나가있었더니 우리나라에서는 또 이렇게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났었군요...정말 바쁘게 움직이는 민족이에요. :) 이건희 회장의 인터뷰에서도 많은 느낌들과 insight을 받았습니다. 호선배의 translation에도 Thanks. :)

    2008/04/07 10:13
    • 김호  수정/삭제

      어디 좋은데 다녀왔나봐요. 부럽네. 이번 사건이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삼성에게도 사회에도.

      2008/04/07 19:46
  2. jisoo  수정/삭제  댓글쓰기

    청사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에 우선 국민 여러분들께 한 말씀 해야함을 잊지 않는 이건희 회장의 모습에 한숨 돌렸지만, 또 다시 쏟아지는 질문에 주저하기도 하는 모습에 제 가슴이 점점 콩닥콩닥 해옴을 느꼈어요. 오늘 오후에 재소환된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 작가로 다시 활약하는 모습을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 지난 수업 때 함께 해 본 정몽준 당선자의 PR실무자 역할 연기도 떠오르네요.^^

    2008/04/11 11:55
    • 김호  수정/삭제

      오늘도 한 번 지켜보지요. 지금 기차 안이랍니다. 잠시 후 수업 때 봐요.

      2008/04/1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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