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란 말이 한 동안 유행했지만, 누구나 정말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번주에는 오랜 세월 동안 비슷한 코드를 느끼며 살았던, 그러나 잘해야 일 년에 한 번 정도 볼까한 선배와 다소 긴 점심을 함께 했다.

신성욱 선배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배로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15년 가까이 KBS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 처음에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시작하여, 현재는 KBS의 사내벤처로 만들어진 프로덕션에서 PD로 일하고 있다. 철학을 부전공으로 했던 나는 이 선배와 대학시절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진 못했어도 친근함을 느꼈고, 내 기억속에 남는 그 선배는 거의 매일 같은 국방색 재킷을 입고 다녔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재킷은 신 선배에게는 일종의 브랜드였던 셈이다.
 
워낙 오랫만에 만난 선배라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앞으로는 서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근황을 묻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대화를 나누던 중 15년 가까이 다큐멘터리만을 고집해온 그 선배에게 다큐멘터리에 대한 그의 생각이 듣고 싶어졌다. 선배와의 대화에서 나온 몇 가지:
 
1/ 블로그와 같은 1인 미디어, 오마이뉴스와 같은 시민 저널리즘이 기존 저널리즘의 역할을 어느 정도 대체할 것인가와 관련해서는 straight news는 많은 부분 영향을 받을 것이나, 기존의 저널리즘이 계속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탐사 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일 것이라는 점에 공감했다. 물론 향후에는 UCC등을 활용한 1인 혹은 소규모 다큐멘터리 프로덕션도 생겨날 것이다.

2/ 그에게 있어 다큐멘터리의 정의는 간단했다. 바로 "사람에 대한 관심"이며, 이를 위한 전략으로서 다큐멘터리 제작시, "in-depth하게 계속적으로 파고가면서 본질이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비유로서 그는 최근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로버트 카파의 전시 작품들을 예로 들었다. 로버트 카파는 계속적으로 전쟁터 속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해가면서 셔터를 눌러댔고, 사진을 통해서 전쟁속에서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3/ 그 자신이 제작한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2000년 12월 24일 방송된 "침묵으로의 초대 - 트라피스트 수도원"이라는 작품이다. 이는 그가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모두들 화려하고, 시끄럽게 보내는 세태에서 침묵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미국의 봉쇄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혼자 들어가서 어렵게 찍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침묵의 서약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수도사들이 정작 힘들게 살 줄 알았지만, 매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결국, 신 선배는 일반 사람은 평생 구경하기 힘들, 트리피스트 수도원 구석구석의 구체적인 삶을 카메라에 담아 내보냄으로써, 결국 목소리 높은 사람이 이기는 이 세상에서, 침묵이라는 앵글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려 했던 것이다.
 
문득, 대학시절 중국철학 전공 교수님께 수업시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보통 휴게실이라고 하면,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휴게의 휴(休)는 나무그늘에 머물러 쉰다는 의미이고, 게(憩)의 구조를 보면 혀(舌)가 쉰다(息), 혹은 머물러 숨을 쉰다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즉, 진정한 휴식이란 일정부분 침묵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 어쩌면, 그 선배가 말한 다큐멘터리의 정의는 모든 분야의 정의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전문가, 전문분야란,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앵글(PR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세상을 바라다보고, 그러한 각도에서 세상을 파고가면서 인간의 본질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PR이 나타내는 인간, 인간사회의 본질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가지면서, 나의 half-time 동안에는 지난 10년 동안 고생했던 내 혀를 좀 쉬게 해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라피스트의 수도사만큼은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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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쥬니캡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블로그를 통해 신PD님 소식을 듣게 되는군요. 멋진 분이여서 기회가 많이 친해지고 싶은 분인데, 기회가 되진 않네요. 캐나다 아직 안가셨나봐요?

    2007/06/20 16:24
    • 김호  수정/삭제

      :) 이제 15시간 정도 있으면 떠납니다. 또 블로그를 통해 만나요.

      2007/06/20 19:31
  2. 정용민  수정/삭제  댓글쓰기

    혀를 쉰다는 말이 맘에 드네요. 쉬어야되는데...

    2007/06/20 19:03
  3. 조현경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도, 침묵, 노동'만으로 살아가는 트라피스트 수도원.
    너무나 인상적인 다큐였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갑네요.

    지극히 사회화되고 관성화되어버린 몸둥이인 터라,
    '느리게 사는 삶'에 대한 로망과는 달리
    '침묵의 삶'에 대해서는 공포가 앞섰던 기억이 납니다.

    어서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야 할텐데요, 호호.


    선생님, 안녕하세요?
    기억하실련지는 모르겠지만, 19기 조현경입니다.

    선생님의 half-time은 저희들 사이에서도 화두입니다.
    가끔 들려서 소식듣고 갈게요.

    행복하세요.

    2007/06/21 19:52
    • 김호  수정/삭제

      이 다큐멘터리를 보았다는 분을 자주 보네요. 아마도 깊은 인상을 주었던 프로그램이었나봅니다. 이렇게 들러주어 고맙습니다. 저도 침묵하고 살라고 하면 아마 공포가 앞서겠지요?:) 어쩌다 가끔 침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괜찮겠지만요.

      2007/06/22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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