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는 하루 종일 Doug와 일정을 보내고, 저녁 6시 쯤 호텔을 나섰습니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는데, 마차를 이끄는 마부가 도시를 한 번 돌아보라고 '영업'하길래, 그것도 괜찮겠다 싶어, 마차를 타고 간단한 시티 투어를 했습니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은 St. Louis의 도심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썰렁했지요. 이곳에서 두 사람에게 저녁에 가 볼 만한 곳을 물어보았는데, 두 사람 모두 말 끝에 "택시 타고 호텔로 돌아오라"라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마부에게 물어보니, 안전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군요. 예전에 St. Louis에는 커다란 경기 불황이 있었고, 당시에 범죄율이 미국내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높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경제도 나아지고 있고, 범죄율도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옛날 생각 때문에 저녁이 되면, 이렇게 도심을 걸어다니는 것을 피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서울은 훨씬 안전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피하고 남은 텅 빈 공간(empty space)'은 왠지 썩 좋지 않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2. 마차 타고 투어를 마치고는 저녁에 호텔 바에 들러 맥주와 간단하게 저녁을 먹는데, 한 Jazz밴드가 신나게 연주를 하고 있더군요. 그들의 연주를 들으며, 피아노 선생님이 제게 해 준 말이 생각났습니다. "피아노는 베이스가 하는 영역도, 색소폰이 하는 영역도 모두 연주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밴드에서 피아노를 칠 때는 모든 것을 다 표현하기보다 베이스와 색소폰이 빛날 수 있도록, 그들의 영역을 비워주어야 합니다..."

피아노를 배우며, 들은 말 중, 기억에 남는 멋진 말이었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빈 공간'을 둘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팀으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리더가 빠질 수 있는 덫(trap)중 하나가 무엇이든 자기가 모든 것을 다하려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1. Goldsmith는 리더가 잘못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부하직원의 일에 대해서 무엇이든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반성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상사직원으로서 부하직원과 업무 미팅을 할 때, 상사들은 무언가 지적을 위한 지적이라도 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자신이 뭔가 가치를 더 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압감이지요. (이러한 '부작용'은 컨설턴트들에게도 있습니다. 무언가 컨설팅을 해야 한다는 강압감이지요...)
 
2.2. Tom Peters의 Re-imagine 강연 비디오를 보면서, 그가 전하던 말 중에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리더가 하는 말 중 가장 위대한 말은 "I don't know"라고. 리더는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에 필요한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하는 사람이고, 조직의 살림살이 꾼이지요. 실제 일은 각 분야의 전문가가 하는 것이지, 리더가 다 알 수는 없겠지요.

2.3. 그것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모든 악기를 다 연주할 수 없는 것과도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지난 토요일 아틀랜타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바이올리니스트인 핑커스 주커만(Pinchas Zukerman)이 Atlanta Symphony Orchestra와 함께 '지휘자'로서 나온다기에 가 보았습니다. 멀리와서 마침 그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도,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가 지휘자로 무대에 서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천재적인 음악가라 할 수 있는 그도 바이올린, 비올라, 지휘자 정도의 다양성을 가질 수 밖에 없지요. 조직의 리더도 마찬가지 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휘자도 모든 기능에 있어 전문가가 될 수는 없지요. 지휘자가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조직의 리더도 개별 전문가들이 전체적인 하모니를 연출할 수 있도록 지휘하는 것이겠지요. 이럴 때, 지휘자는 상황에 따라, 어떤 부분을 '빈 공간'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프로젝트에 따라, 주도하고, 빛날 부분이 어디인지를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3. NASAGA 컨퍼런스에서 들었던 세션 중의 하나는 미국인으로서 대만에서 20년 넘게 살며, 현재는 트레이너로서 활동하고 있는 Jimbo라는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양에서 배운 것을 활용하여, 金, 水, 木, 火, 土라는 오행의 개념을 활용하여 게임 디자인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션을 들으며, 트레이닝을 디자인할 때, 참가자들을 위한 '빈공간'을 설계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진행자가 쉴 새 없이 자신이 아는 지식을 쏟아붓는 강연은 그럴 듯 하지만, 청중이 정작 자신의 일자리로 돌아갔을 때는 별로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퍼포먼스에서 긍정적 변화를 만들 수 없는 경우가 많지요(impressive, but, not impactful). 특히나, 바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트레이닝에서는 그들이 트레이닝 안에서, 자기의 변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디자인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트레이닝에서 두꺼운 파워포인트를 쓰기 보다는, 참석자들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 그리고, 자기의 노트에, 자신의 변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정리할 수 있는 '여백'을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 삶에서의 여백이 있습니다. 예전에 "컨설턴트들의 커리어 성장 실패 원인 1위는?"이라는 파드캐스팅을 통해서도 말씀드린 바가 있었는데, 우리 삶에서 on & off의 중요성은 갈수록 크다는 생각을 합니다. 여백(off)을 주어야 할 때도 완전히 off하지 못하는 병을 현대인들은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도 하프타임이라는 것이 제 삶에서 여백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제가 갖고 있는 첫번째 하프타임에서 제가 그나마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다면, 더 완벽하게 off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두번째 하프타임에서는 좀 더 깊은 여백을 갖고 싶습니다. (친구들한테 돌 날라 오겠습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생각해 본, 여백은 이처럼 몇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1. 사람들이 피하고 남은 여백
2. 남이 빛나도록 내가 배려하는 여백
3. 남이 긍정적 변화를 위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여백
4. 삶에서 가끔 뒤로 물러나 어디쯤 와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살펴보기 위한 여백

1번은 외롭고, 썩 내키지 않는 여백일 수 있겠습니다만, 나머지 여백은 긍정적 여백으로서 살아가면서, 잘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동안은 너무 여백없이 살아왔다는 반성을 하면서 말입니다...

"Playing Empty 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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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워주는 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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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노는 베이스가 하는 영역도, 색소폰이 하는 영역도 모두 연주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밴드에서 피아노를 칠 때는 모든 것을 다 표현하기보다 베이스와 색소폰이 빛날 수 있도록, 그들의 영역을 비워주어야 합니다..." (중략) 리더가 하는 말 중 가장 위대한 말은 "I don't know"라고. 리더는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에필요한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하는 사람이고, 조직의 살림살이 꾼이지요. ...

    2007/10/17 09:16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산나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도 참 쉽지않더군요. 전 off의 시간을 갖기 시작한 뒤 뭔가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는 시간 사용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꽤 한참 걸렸습니다. 나도 모르게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몸에 짙게 배어있다는 걸 절감했지요. 지금은 내가 날 잘 돌보는 것 자체가 생산적인 것이라고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지만요~ ^^ 그래도 여전히 누가(특히 직장 후배들이) '요즘 뭐해요?'하고 물으면 뭐라 딱히 설명할 길이 없어 절절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네요. 거 참..생산성에 대한 압박도 참 질긴 병이예요.^^

    2007/10/16 22:43
    • 김호  수정/삭제

      하긴 여백이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직장 생활이란 어떻게 '효율'이란 이름으로 여백을 꼬빡 메꾸어 가는가를 연습하며 살았던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런 생활에서 갑자기 여백을 '연주'하려니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생산성에 대한 압박도 당연히 있구요. 요즘 뭐해요, 라고 물을 때, 마땅한 답변이 없어 당황하는 것도 공감이 가네요:) 한편 생각해보면, 나이들어 '어쩔 수 없이' 여백을 강요당하는 것보다는, 지금부터 삶에서 여백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나름대로의 연주법을 터득해가는 것이 낫겠다는 뭐,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수산나님께서 하프타임동안 여백을 더욱 즐기시길!

      2007/10/17 04:30
  2. cansmile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는 참 리더의 자리에 섰을 때 비워주는 일을 잘 해내지 못했고 지금도 그런 부분에서 어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관련글을 작성해서 보내겠습니다.

    2007/10/17 00:08
    • 김호  수정/삭제

      네. 기다리지요. 트랙백으로 보내주세요. 아래 글을 요청대로 지워드릴께요.

      2007/10/17 04:33
  3.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007/10/17 00:18
  4. 쥬니캡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즈연주와 비유해서 쓰시는 글을 접할때마다 느끼는 게 하나 있는데요. 저도 악기를 하나쯤은 좀 잘 다루고 싶네요. 40이 되기 전에 도전해야 할 거 하나 추가임다!

    2007/10/17 00:43
    • 김호  수정/삭제

      색소폰이나 기타 어떨까요? 잘 어울릴 듯 한데...

      2007/10/17 04:34
  5.  수정/삭제  댓글쓰기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2007/10/17 03:47
  6. cansmile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슨 문제가 있는지 티스토리에서는 트랙백 전송이 계속 실패하네요. 그래서 이글루스에 애니관련 블로그에 복사해서 전송했습니다.
    어차피 말미에 애니메이션 이야기도 나오니까요. ^^

    2007/10/17 09:20
    • 김호  수정/삭제

      들어가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솔직한 글이라 더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트랙백을 걸어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07/10/17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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